위대한 인민의 당, 남북통일당
3만 5천 탈북민들이 살았던 미지의 세계, 북한의 정치권에는 여(與)·야(野)가 없이 유일하게 ‘조선노동당’만이 존재한다. 1945년 10월 10일 김일성이 평양에서 창당한 ‘노동당’은 곧 수령(대통령)이고 혁명의 수뇌부이며 참모부이다. 손에 총을 들고 나라를 지키는 군대도 당의 군대이다. 2천만 인민은 당의 참된 아들딸로 아버지(수령), 어머니이며 운명이고 미래인 ‘조선노동당’을 절대적으로 믿고 따라야 한다. 노동당에 반하는 행동이나 발언은 반역행위나 다름없다. 자유와 빵을 찾아 대한민국에 온 탈북민들은 정치권의 여·야 모습을 보며 감동을 금할 수 없어한다. 국민들의 생활향상과 경제발전, 국가안보와 문화부흥 등을 위해 국회의원들이 여·야로 나뉘어 치열하게 경쟁하고 비판하며 혁신한다.
70년 탈북민역사에 특별함의 하나가 순수 탈북민들이 창당하고 운영하는 당이 있다는 것이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공식 등록한 정당이다. 창당 3주년을 맞는 ‘남북통일당’의 최정훈 대표를 서울 강서구 소재 중앙당사에서 만났다.
- 이렇게 마주 앉기 처음이다(웃음).
먼저 대단히 미안하다(웃음). 5년 전 탈북아사 고(故) 한성옥 모자(母子) 추모 서울광화문 분향소 현장취재를 고의적으로 방해했던 점 진심으로 사과한다. 미숙한 나의 모습을 많이 반성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우리 ‘남북통일당’의 다양한 활동소식을 꾸준히 보도해주는 것에 대해 진심으로 고맙다는 마음을 가졌다.
- 고향이 어디인가.
1971년 5월 양강도 혜산에서 태어났다. 4형제의 맏이였고 부친은 보위(정보)기관 일군, 모친은 주부였다. 1988년 9월 조선인민군 제144군부대(미림대학) 입대, 경비소대에 배치를 받아 6년간 복무, 최종 군사직무는 부소대장이었다.
1994년 인민군 중대정치지도원을 양성하는 ‘김일성정치군사대학’(3년제, 평양시 형제산구역 소재)에 입학하였다. 97년 4월에 졸업하고 미림대학 보장중대 정치지도원(군사계급 중위)으로 임명을 받았으며 그해 11월에 제대하였다.
- 군사복무 기간 기억에 남는 일은.
김일성정치군사대학 시절 8개월간 매일 한 끼 죽을 먹었다. ‘충성아첨꾼’들인 인민무력부 총정치국 간부들이 최고사령관 김정일에게 “인민군대에서 식량을 절약하여 나라에 바치겠다”는 제의서를 올렸던 것이다. 하여 24개 중대, 8개 대대의 새파란 청년군인 학생들 약 3.000명이 저녁식사로 죽을 한 그릇씩 먹었다. 이후 오줌발이 서도 참는데 오줌을 싸면 배가 고프고 그러면 잠이 오지 않기 때문이다.
- 또 다른 특이한 일이 있었다면.
제대 후 아침 출근길에 집을 나서면 주변에 꽃제비(거지 방랑아)들이 3~5명씩 앉아 있고 저녁에 보면 시체로 변해있다.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았고 다음날 927상무(꽃제비 단속 규찰대) 사람들이 와서 시체를 화물차에 실어간다.
1998년 즈음에는 하루에 적게는 130구, 많기는 300구의 시체가 발생했다. 주로 아이들과 노인들이었다. 화물차에 퇴비(거름)처럼 실려진 시체는 도시 외곽의 공동묘지에 묘비도 없이 크게 파진 웅덩이에 집단 매장되었다.
- 군에서 조기 제대한 이유는 뭔가.
김정일이 “보위기관의 자녀들을 대를 이어 당에 충실한 후비대로 양성하라!”는 내부 방침을 내렸다. 참고로 인민군에서는 제대군인들의 당적(당원이동증)을 배치된 사회기관으로 바로 넘긴다. 약간의 공백과 자유도 없는 것이다. 배치 기관의 직무는 양강도 보위부 소속 금장(금 캐는 광산, 보천군 신흥리 소재) 보위대 초소장.
- 보위부가 왜 금을 생산하는가.
거두절미하고 노동당에 바치기 위해서다. 북한의 보위부는 남한에 비유하면 국정원에 해당되는 국가최고의 비밀정보기관이다. 김일성 수령일가 3대째인 독재자의 사당, 조선노동당에 충성자금을 바치는 데는 어느 기관도 예외가 없다.
금장에는 4천명의 노동자들이 일을 하는데 1년에 보통 적게는 40kg에서 많기는 60kg의 금이 생산되어 평양에 바쳐진다. 알게 모르게 금을 몰래 훔쳐 빼내는 사례가 있어 보위대원은 실탄을 장전한 자동보총을 소지하고 근무한다.
- 다른 경력은 어떤 것이 있나.
1999년 4월 양강도청년동맹위원회 산하 소년회관 공급지도원의 직무를 맡았다. 후방물자(식품 및 생활용품) 관리·공급을 전담하는데 국가에서 주는 것은 하나도 없고 전부 자체로 해결해야 한다. 2005년 4월 양강도당학교(일명 공산대학, 3년제)를 정규 졸업하고 혜산상하수도건설직장 초급(무급) 당비서로 임명을 받았다. 독립기관으로 당위원회 아래 2개 세포가 있었으며 당원은 모두 18명이었다.
- 탈북 동기가 궁금하다.
2006년 10월 중국 지인한데서 납북자(최욱일: 1975년 8월 강릉 주문진항 출항, 33명 승선한 천왕호 사무장)를 찾아달라는 부탁이 왔다. 그를 중국으로 데려와 서울서 온 딸을 만나게 하면 그에 대한 사례금 1만 달러를 받기로 했다.
이후 2개월간 황해도 연산, 강원도 고산을 거쳐 함북 김책(옛 성진)서 그를 찾았다. 후에 안 일이지만 그를 찾으러 갔던 브로커가 6명. 모두 거절하고 내 제안을 받아들인 것은 솔직한 마음(사례비 받겠다는 심정)에 동의했다고 한다.
- 언제 두만강을 넘었는가.
2006년 12월 25일 국경경비대원에게 뇌물을 주고 최욱일과 두만강을 건너 중국 땅에 발을 디뎠다. 납북자와 함께 탈북한 사례가 초유의 일이었다. 당일 중국서 이동 중 교통사고를 당했고 며칠 후 연길로 갔다. 이후 최일욱은 미리 기다렸던 가족과 함께 심양 주재 한국대사관에 들어갔다. 그게 한국 언론보도에 나갔다.
- 약속된 1만 달러는 받았나.
받았으면 북한으로 갔겠지(웃음). 속았다. 북으로 다시 가겠다는 나를 보며 브로커들은 이왕이면 한국으로 가라고 했다. 이후 아버지와 통화했는데 “보위부서 너에 대한 체포령이 내렸으니 절대 입국하지 말라!”고 했다. 심장이 떨렸다.
비장한 고민 속에 무엇보다 가족을 데려와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아내와 아들(10살)을 접경지역으로 불러냈고 며칠간 설득을 했다. 이후 연길에서 9개월간 숨어 지내다 곤명, 미얀마, 태국을 거쳐 2007년 9월 한국으로 왔다.
- 서울생활 초기 어떻게 보냈나.
2008년 3월 사회로 나왔다. 아내와 함께 모 제조회사에 취업하여 1년 7개월간 일하였다. 이후 인천국제공항공사 입사, 특수경찰로 근무하던 중 3개월 만에 퇴직했다. 당시 천안함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 여파로 정부에서 총을 소지하고 공기업 및 공공기관에 근무하는 탈북민 상황은 부적절하다는 지침에 따른 것이다. 북한한데 뺨을 맞고 탈북민에게 해보는 것 같이 느껴져 매우 황당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 남북통일당을 소개해 달라.
지난 21대 총선을 수개월 앞둔 2019년 말부터 ‘국제탈북민연대’ 김주일 사무총장의 노력으로 여러 단체장들이 한 자리서 숙고를 했다. 이후 이듬해(2020년) 2월까지 서울서 1~4차 준비모임에 참석한 탈북단체장은 대략 20명 안팎이다.
여기서 남북통일당 창당 발기 취지문이 나왔고 중앙당 및 지역당 구성안 등이 심층 토의되었다. 2020년 2월, 서울 여의도 전경련회관에서 탈북단체장 및 탈북민 등 200명 발기인의 참여로 남북통일당 창당발기인 대회가 진행되었다.
- 구체적으로 설명해준다면.
서울특별시와 경기도 등 전국 5개 지부가 결성되었고 5.000명 탈북민 회원이 모집되었다. 그해 3월 6일 사상 최초로 탈북민정당, ‘남북통일당’의 탄생을 알리는 창당대회가 전경련회관에서 있었다. 공동대표, 사무총장, 11인 최고위원 지도부체제로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공식 등록했다. 나는 서울시당위원장 직무를 맡았다.
- 창당 의미는 뭐라고 보나.
김일성의 남침으로 발발한 한국전쟁 휴전 해인 1953년부터 시작한 탈북민 역사이니 올해로 꼭 70년이 된다. 장장 70년 탈북민 역사에 그 주인공 탈북민들이 직접 만든 첫 정당이 바로 남북통일당이다. 정말로 가슴이 벅찬 사변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3만 탈북민은 2천만 인민의 진정한 대표이다. 자손대대 인민에게 굶주림과 억압·구속만을 강요하는 조선노동당은 김정은 독재자의 사당이고 그 인민에게 정의·자유를 전파하는 탈북민들의 정당 남북통일당이다.
- 당 활동 초기를 말해 달라.
초대 대표는 공동으로 김성민 자유북한방송 대표와 안찬일 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이 맡았다. 특히 김성민 대표는 항암치료 중인데도 오로지 사명감으로 이 일에 두 팔 걷어 부치고 나섰다. 남북통일당이 창당된 다음 달에 진행된 21대 총선은 득표율에 따라 의석수가 배분되는 연동형 비례대표제로 실시되었다. 참고로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등록한 정당이 선거기간에 후보를 내지 않으면 등록 제명(취소) 된다.
- 그래서 한미옥 후보를 출마시켰나.
그렇다. 남북통일당 비례대표 국회의원 후보로 한미옥 인천시당위원장을 출마시켰다. 탈북민들이 뽑은 우리당 후보의 국회입성을 위해 애써 노력을 했고 림일 작가가 인터뷰와 취재로 한미옥 후보를 많이 홍보했지만 결국 낙선했다.
그 책임으로 김성민·안찬일 공동대표가 전격 사퇴했으니 망연자실했다. 3개월간 비상대책위원회 체제로 이어갔고 비대위원장은 허광일 북한민주화위원장이 맡았다. 그해 7월 신임 당 대표 선출이 있었고 내가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 당 대표 선거 출마 이유는.
안타까운 마음에서다. 남북통일당이 생겨 겨우 6개월도 안되어 위기에 빠졌다. 선장이 없는 배는 항해가 어렵다. 사람들은 보통 정치문제를 외면하는데 그게 아니다. 남한이 자유민주주의가 된 것은 국민들의 정치의식이 깨어있었기에 가능했다. 북한주민은 정치문맹자이어서 80년이나 수령 독재국가에서 짐승처럼 살고 있다.
- 그동안 어떤 일을 했는가.
작년 3월에 있은 제20대 대통령선거 때 보수정당인 국민의힘과 공식적으로 통합을 선언했고 윤석열 후보를 공개 지지하였다. 참고로 ‘합당’은 양당을 하나로 합치는 것이고 ‘통합’은 양당의 정책과 비전, 전략 등을 공유하는 것이다.
과거 두 차례의 전당대회를 개최했고 인천, 부산, 충북 등 지역대의원대회는 수차례 진행하였다. 올해 초 국립서울현충원 참배를 시작으로 모 통일운동단체와 업무 협약식을 체결했다. 현재는 전국 7개 지부, 1만 2천명 회원이다.
- 내년 22대 총선 어떻게 준비하나.
21대 총선처럼 비례대표 국회의원 후보도 내겠지만 22대 총선에는 지역 국회의원 후보도 내려고 한다. 최종 당선을 위한 목적도 있지만 탈북민들이 만든 정당인 남북통일당의 존재감을 지속적으로 홍보하기 위해서이다. 우리 남북통일당은 저 38선 이북에서 희대의 독재자 김정은의 발굽 아래 신음하는 2천만 우리 동포에게 언제나 희망이고 꿈이 되자는 것이다. ‘남북통일당’은 2천만 인민의 정당이다.